혼돈에 처한 사람들이 흔히 겪게 되는 현상 중 하는 종종 특정 단어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짧은 시기 동안 서로 다른 장소에서 그 단어를 여러 번 듣거나 읽게 된다. 그 단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을뿐이다. 다만, 사람의 감각들이 열리고 나면 아주 신비하게도 언어의 조각들이 기호들을 끌고 나오기 때문에 갑자기 두드러져 보이게 되는 것이다.  -p 15~16

 부분적으로는 불확실성에 대한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할 때 어떤 것이 중요한 부분인지 확신할 수 없고, 명확한 해답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 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거만한 취사선택이라는 비난(신도 아니면서 일개 전기 작가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일생을 좌지우지 할수 있단 말인가?)을 피하려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남겨 둔다. 작품의 가치에 대한 비난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씌어지는 대상, 즉 주인공에 대해 어떤 판단이 내려질지가 두렵기 때문이다. 전기가 주인공의 삶의 일부를 담은 것이라면,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당연히 그 삶의 일부일수 밖에 없는것이다. - p296

  누군가가 배리 매닐로의 음악에 빠져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의 성향을 이렇게 짐작할지도 모른다.
......(중략)......
이중에서 어떤것이 진실인가? 이런 도식 속에 진실이 있을리 없다. 그것은 엉성한 이해가 빚어내는 위험한 착각이다. - 이것이 집단 차원으로 확대되면, 우피 골드버기는 총 맞아 죽어야 하고 달라이 라마 숭배자들은 시멘트속에 산채로 매장해버려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게임은 자체의 마력이 있는데, 우리가 누군가에 관해 잘 알지 못할수록 그 마력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문학작품속의 다채로운 인물드은 두 가지 차원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우리는 파머 공주보다는 프루스트 작품의 화자에 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인물의 역할로 보면 공주가 훨씬 낫다. 우리는 그녀를 기억할때 한가지 특징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친절의 전형이 되고자 하고, 이 터무니없는 명령덕에 그에 따르는 모든 행동이 구속을 받는다. 반면 프루스트 작품 속 화자는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한 폭넓은 사고와 인식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도무지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하다. 화자의 삶의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 일상과의 연결고리가 부재하고, 모순되는점 또한 너무 풍부하다. -p306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이사벨만의 정신세계가 있었고, 서글프긴 하지만 서로에 대한 차이를 존중해주기로 결정했다. 왜 서글픈가? 누군가가 차이를 존중한다고 우쭐대며 말하는 것은 곧 그가 존중하려는 것들에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가 솔직하다면 논리상으로는 존중할수가 없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 가치를 어찌 존중할수 있겠는가? -p325

 나의 무지는 부분적으로는 불운의 결과이긴 했으나, 아마도 앎의 곡선을 이루는 자연스러운 경사면의 일부였을 것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때, 우리가 알고 싶은 사실들은 이미 정점에 달한다. 점심과 저녁을 같이 먹으며 우리는 가족과, 동료, 일, 어린시절, 삶의 철학 그리고 그들의 로맨스에 관해 탐구한다. 그러나 일단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 반갑지 않은 단계를 맞는다. 친밀해졌다고 해서 좀더 심오한 주제에 관해 긴 대화를 하게 되는것도 아니고, 서로 상반된 시나리오를 펼치기 일쑤다. 25주년을 맞은 커플은 점심식사를 하며 양털 옷감이나 날씨변화, 찬장에 둔 꽃병 속의 튤립상태나, 침대 시트를 오늘 바꾸는 것이 좋을지 내일 바꾸시는 것이 좋을지에 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 미래가 창창한 어떤 커플이라면 그림이나, 책, 음악이나 복지 정책에 관해 신랄하게 의견을 교환할 것이다. 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알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는 역설을.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사과를 다 먹어치울 만한 시간에서 수도꼭지가 다 말라버릴 만한 시간까지로 무한정 확장한다고 해서 훌륭한 대화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다. 서로에 관한 궁금증이 더이상 급격하게 솟아나지 않는 것은 삶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앎이란 그것을 어느정도 소유했는지를 암시한다. 타인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요구를 외면한다. 키르케고르의 아이러니 이론에 대한 그들의 관점처럼 쉽게 다루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모두 외면당한다. 더욱이 누군가를 더 오래 알수록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자책감도 늘어난다. 주어진 시간 내에 그들의 강아지나 아이, 아버지의 이름이나 직업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제 맥락 안에서는 그들에게 이질성을 드러내 보이는 장치가 돼버린다.  -p 327

 이중에서 더 중요하거나 감동적인 에피소드란 없다. 나의 이사벨은 당신의 이사벨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p334







개인적으로 키스하기~ 의 책제목은 좀 너무하다 싶었다.
원 제목은 kiss &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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