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무살이 되면 자기 성을 골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꼭 스무살이 아니더라도 뭔가 정신적으로 딱 적절한 선이 있어서 이걸 넘어가는 사람에게만
성을 고를수 있는거라던가.. 확실히 다양성 면에서는 떨어지겠구만.
만약 머리가 굵어서 성별을 택할수 있다면 그럴수 있다면,
난 아마도 여자를 택했을꺼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낳을수 있잖아..
(생리통의 고통은 안겪어봐서 잘 모르겠다. 긁적)

2. 밥을 안먹어도 배고프지 않은. 그러니깐 사람이 광합성쯤 할수 있게 된다면, 세상은 좀더 평화로와질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람들이 욕심내는건 먹기 위한걸 뛰어넘었으니깐. 게다가 굶주림이 없다는건.
꽤나 게을러질꺼 같다. 역시 나같은 경우에는 말이다.

3. 향유고래 영어로는 Sperm Whale 이다. 약간 민망한 이름이기도 하네. 그래서 난 physeter 라는 분류 학명을 더 좋아한다. 이빨을 가진 생물 중 가장 큰 동물이다. 또한 가장 깊게 잠수할수 있는 생물이기도 하고. (대왕오징어를 먹는다고 하더라) 근데 무엇보다도 참을수 없이 좋은건 가만히 있어도 미소짓게끔 보이는 그 외모 때문이다.
난 왠지 모르게 저 모습이 정감이 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뭐 여튼.

4. 사실 불편한글을 이곳에 여러개 써왔다고 생각한다. 의식하고 쓴 부분도 있고 무의식중에 썼다가 나중에 보니 역시 불편한글들이 여기저기 있다. 여기서 불편하다는건 자학스럽고 자폐스러운글들을 말한다. 뭐 그런 느낌을 안받았다면 다행이지만. 남의 관심을 그런식으로 구걸하는건 과히 좋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 자신을 진단해본 결과 꽤나 큰 부분이 있다는걸 알았다. 그건 남들의 기분마져도 깎아 내리며, 관심을 구걸하고, 심지어 그것을 나자신에게 습관화 시키기도 한다. 별것 아닌것들에 대해 힘들어 하고 관심을 구걸하는것. 여전히 협소한 내 인간관계 때문에 그런 균열이 생겼지만, 이 문제를 어찌 처리해야 할것인가에 대한 건 아직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난 자기자신이 정확히 나를 판단한다는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내가 정말로 힘들어 하는건지, 아니면 위와같은 이유로, 오로지 남의 연민을 얻기 위해 행동하는건지에 대한 확실한 선을 그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블로그를 접을까도 생각했었다. 만약에 이 경우가 최악의 후자라면 나는 이런종류의 글들을 블로그에 쓸 이유가 없다. 차라리 일기장을 쓰는게 낫지.

5.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쓰는것은 항상 어렵다. 댓글은 무언가 의견을 제시할수 있을때 이루어져야만 하며, 그 포스팅에 대한 다른 시각으로서 혹은 동조로서 씌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내 이웃분들은 내 영역 밖의 것들을 이야기 하며, 난 여전히 그런것들에 대해선 내 의견을 말할수가 없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아무것도 판단할 잣대가 없음이고,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작 할수있는건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딴청을 부리는거다. (낄낄)

6. 결국 3만원 있을때 남 혹은 친구를 위해 한푼도 쓰지 못한다는건 3억원이 있어도 100원조차 쓰지 못하는 인간일수 있다는것이다. 모든 경우에 대해서 단정할수는 없지만 난 그런식으로 밀어두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는 현재일뿐이고, 그 시간과 그때 투자할수 있는 물질은 극히 한정적이다. 그걸 빌미로 자신의 미래를 판다는건 좀 비겁하지 않은가 싶다. 아니면 최소한 고마운 마음이라도 말로써 표현 하던가. 즉 10년뒤에 내가 잘해줄께 이런말들은 하등 값어치가 없다. 나는 감히 그렇게 생각한다.

7. 나는 어쩌면 이런것들을 동경한다.


8. 나이가 나이인 만큼 설이면 설마다 듣는 소리가 있다. 여자친구는 있냐(요즘은 결혼 언제할꺼냐로 슬슬 바뀌어갈 나이지만) 또는 취직은 했냐. 여자친구는 있냐라는 소리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짓는 그 뭐랄까 하나의 문제라면 취직문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것들을 하지 못하는것같아서. 역시 취직문제보단 여자친구는 있냐고 물어보는 질문이 좀더 좋다.(이게 왜 좀더 좋아야 하는지는...쿨럭)

9. 적당한 선을 긋는것은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서 별로 관대하지 못하고(내 경험상) 그것들은 여전히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게 만든다. 어떠한 선이라는건 그렇게 생긴다. 아침에 안녕 이라고 인사하는건 인사가 그게 전부인것이 아니라. 어떠한 선을 긋게 하는것이다.(보통 예의라는건 그 범주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하는것. 그런것들로 관계는 이루어진다. 아무도 그 이상을 밟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그 부분은 전적으로 정말 자신의것인건가, 아무도 이해하려고, 이해 할수도 없는걸까?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몇몇 친구라 불리는 관계들에게 그 선을 뛰어 넘으려 시도를 해봤지만, 그때마다 생각나는건, 여전히 혼자 삽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러한 관계들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존경할만한 선배? 인생의 구도자로써의 누군가의 표상이 될만한 나이 많은 사람들? 위대한 사상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10. "40살이 되면 너도 김영민처럼 미중년이 될수도 있잖아-" 라는 말을 들었다. 그건 정말 로또맞는것처럼 굉장한 우연성을 가지지만(깔깔-) 정말 그런 미중년이 된다면- 뭐 꼭 그렇지 않더라도. "40살 미중년이 되면 20살 아가씨들을 돈으로 구워 삶을테야. 음하하하"란 말을 했다가 "말 진짜 이쁘게 하네!"라는 핀잔을. 음화화 역시 이런면에선 좀 사악한듯.

11. 내 나이때는 그럴 수도 있다고 그분이 말했다. 이제 30후반인 두분의 말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부턴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두분다 그렇게 이야기하셨다. 어떻게 보면 이건 잣대를 부러트리는것과 같다. 내가 나를 이끌었던건 그것에 대한 동경이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살면 "안된다"라고 말한다.

11.1 그들중 한명은 나에게 말했다. "이 녀석 뭔가 포장은 하고 있는데 그게 진짜는 아냐. 어설퍼."
과연 맞다고 생각한다. 어쩔수 없이 술을 마실수 밖에 없었다. 그건 그가 정확히 내 상태를 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난 할말이 없었다. 다만 앞에 술이있었고 마셔댔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 인생에 대한 대안제시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비방할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나의 몫인데. 나는 꽤나 그들에게 버릇없이 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서 실수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러한 말들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또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갈테니깐. 그자리에서 진짜로 맞고 싶었던건 어쩌면 내가 나를 인정할수 없는 어떠한 부분들을 내 자신이 가지고 있고, 변화시킬수 없음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때문에 그 바닥을 갈구 했던것이고..

12. 말을 어지간히 해도 안듣는건 당신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어찌되었든,말이다. 주변사람이 보기엔 당신이 너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말해지고 듣는 당신은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걸 실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담이 너무 높다. 어쩌면 당신이 그렇게 쉽게쉽게 이야기 할수 있는건 그 시간들을 지나왔기 때문인것일수도 있고, 아직 지나오지 못한 세월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두려운걸수도 있는게다. 그런걸 종종 잊어버리는듯하다.

13. 그래도 잊지않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살아가는게 아닐까 싶다. 나는 남들의 삶이 궁금하다. 너무 답답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땐 그들은 정말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것들을 물어본다. 성의 있게 대답해주는 그들이 너무 좋다. 내가 그들 앞에서 초라할지라도, (외모든 정신적이든 성숙도든.. 어쨌든) 끝없이 날아가는 보이저 처럼 몇년동안 교신이 안되었다가 가까스로 교신이 되는것처럼 말이다. 내가 초라할지라도.

14. 요즘 마을버스 기사아저씨들이 뭔가 이상하다. 신호대기를 기다리는 중에 앞문으로 나가서 담배하나를 피고 오시질 않나. 운전중 핸드폰 받는건 기본이고,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곳에서 승차시도를 했다는 이유로 승차 거부를 하지 않나! 칫 그럴꺼면 10분에 한대정도는 오던가! 덕분에 환승할인도 못받고 전부 내고 탔다. 돈 아까워라..쥘쥘..

15.
Three Passions
 
- Bertrand Russel, Autobiography
 
세 가지의 열정이, 소박하게 그러나 압도적으로 내 삶을 지배해 왔다; 사랑에의 열망, 지식의 탐구,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견딜수 없는 연민. 이 세 가지 열정이 마치 폭풍처럼 나를 즉흥적으로, 번뇌의 깊은 바다를 지나, 절망의 극한까지 이리 저리 몰고 다녔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이유는, 첫째, 사랑은 내게 환희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 - 그 환희는 너무나도 강렬하여 나는 종종 이 몇 시간의 기쁨을 위해 내 나머지의 모든 삶을 희생하려 하였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둘째 이유는, 사랑이 고독을 치유해 주기 때문이다 - 그 끔찍한 고독 속에서 떨고 있는 의식은 세상의 가장자리 위에서 차갑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 본다. 내가 사랑을 추구한 마지막 이유는, 사랑의 화합이라는 신비한 모형 속에서, 성자들과 시인들이 상상해왔던 천국의 예표적 환영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추구했던 것이며, 이런 사랑이 인간의 삶에는 너무 고결해 보이긴 하겠으나, 마침내 - 나는 발견했다.

똑같은 열정으로 나는 지식을 갈망하였다. 나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왜 별들이 빛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숫자가 유동성을 지배하는 피타고라스의 힘을 이해하려 애썼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그 일부를, 나는 성취하였다.

사랑과 지식은 지금까지 가능한만큼 가까이 나를 천국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연민이 늘 나를 지상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의 울림이 내 가슴속에서 되울렸다. 기근에 빠진 어린아이들, 압제자들에게 고통받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천덕꾼 신세가 되는 힘없는 노일들, 모든 고독한 세상과, 가난, 그리고 고통이 인간의 삶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나는 악을 줄이고자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며, 나 역시 고통받는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나의 삶이다. 나는 삶이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내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고 싶다.

- Bertrand Russel, Autobiography

역시 이런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깊은 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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