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 전의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능한 한 오랜 옛날, 나의 유년 시절 초기, 아니 한층
더 예전 아득한 조상의 위치로까지 거슬러올라가야만 할 것이다.
작가라는 부류는 글을 쓸 때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어떤 인간의 일생을 낱낱이 꿰뚫어 알고 있으며, 또한 신이 자기에게 그러한 사실을 얘기라도 해 준 것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실상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나로선 그럴 수가 없다. 여타의 작가들 역시 누구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일 테지만, 개개의 작품 모두가 소중하듯 내게도 나의 이야기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아니,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존재할지도 모르거나 가공적으로 그려낸, 또는 이상적인, 아니면 존재치 않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실제적인 생애를 그린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한층 소중하다.
현대의 인간들은 지금 실재하고 있는 인간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를 예전 그 어느 시대의 인간보다 더 모르고 있다. 단 한번씩밖엔 존재하지 못하는 자연의 귀중한 실험체인 인간들이 서로를 대량 학살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인간이 죽음의 손에 의해 완전 사멸되어 버리는 것이라면, 한 방의 총탄으로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하게 되는 것이라면, 사실 이처럼 이야기를 글자화한다는 건 정말 무.의.미.한. 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든 생을 영위해 가며, 누구를 막론하고 독특한 존재인 데다 특수한 한 '점(點)'이라는 면에서, 또한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교차되는 지점이고 오직 한번뿐이라는 면에서 큰 호기심을 북돋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인간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모두 소중하고 영원하고 경건하며, 또한 어떠한 생애를 살든 자연의 의지를 실현하고 있는 한, 모두가 중요한 존재이므로 누구에게서든 경멸을 당한다거나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들 모두가 정신의 일시적 형상이며, 삶을 얻어낸 고통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수난은 실상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사실적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면, 많은
사람들이 이 느낌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수월히 죽을 수 있듯, 나 역시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난 후엔 좀더 쉽게 죽을 수 있으리라.
나 스스로 자신이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 이르러 고고하게 서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 길, 그 방향을
탐색하는 인간이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젠 전처럼 환상이나 책 속에서 뭔가를 찾으려 애쓰진 않는다. 이미 나의 피가 속삭이는 내면의
교훈을 듣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별로 유쾌하다거나 지어낸 이야기처럼 감미롭지도 못하거니와 조리있게 엮여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마치 더는 자신을 거짓되게 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자의 삶처럼 부조리와 혼란과 광기, 몽상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인간의 생애란 결국 자기 자신에 귀착하기 위한 긴 여로이며, 그 길을 찾아내기 위한 노고이며, 그 오솔길을
암시하는 데 불과하다. 지금까지 완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었던 존재라곤 전무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감지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모든 인간은 그 목적지에 닿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들 인간 모두는 원시시대의 끈적거리는 점액과 껍질 따위의 동물적 출생에 의거한 온갖 너저분한 잔재를 죽을 때까지 질질 끌고 다닌다. 끝내 인간화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이나 개미의 단계에서 성장을 그쳐버리는 인간도 있고, 머리만 인간이고 그 아랫부분은 물고기인 상태의 사람도 있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인간은 모두 인간화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은 심연에서 비롯되어 같은 어머니를 통해 출생된 자연의 자식이며, 그 각각이 독자적인 목표를 향해 전진해 가는 낱낱의 실험체이기도 하다.
각기 독보적 존재이기는 하나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가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지닌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다.
데미안 서문 -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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