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저자
박범신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4-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네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를 사랑했다!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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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별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자네에게 가르쳐주었는지 모르지만,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일 뿐이네. 사랑하는 자에게 별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배고픈 자에게 별은 쌀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순정이 있었고, 충직했고, 보기에 따라선 쌍꺼풀도 남달리 이뻤다. 그러나, 서지우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멍청’했다. 감수성이란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것일진대, 그에겐 그게 없었다.

향기 나는 너의 머릿결이 어깨, 이마를 먼저 비질하고 지나가자, 온화한 선지자처럼, 이번엔 네 가슴결이, 어깨를 쓱 스치고 머리께로 올라왔다. 이제 두 달만 지나면 열일곱 살이 될 가슴이었다. 그것은 넘치지 않고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남해의 태양빛이 잘 익힌 오렌지 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자꾸 황금빛 오렌지의 원융한 테두리가 보이고, 바다로 내뻗은 팥알 같은 유두와 보라색 젖꽃판이 보였다. 그것들은 마치, 네 손등 위, 울근불근하던 피돌기처럼, 쏜살같이 내 시야로 진군해 들어왔다. 그리고 차츰 팽창했다. 어깨에 닿았던 가슴이, 네가 위치를 바꾸는 데 따라 머리, 광대뼈를 건들고, 턱을 살짝 눌렀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손끝은 껍질을 벗겨내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었으며, 입술은 오렌지 단물을 베어물고 싶어 지옥문처럼 굳었다. 향기가 네 머리칼, 가슴에서 났다. 쥐스킨트 소설 『향수』에서 완성된, 세상의 모든 시간을 해방시키는 ‘처녀의 향기’였다.

생은 결과적으로 내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조심했고, 억눌러 견디었다. 시가 감정의 분출을 받아쓰는 것이라고 여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감정은, 일종의 얼룩에 불과했다. 싸구려 얼룩들을 지워야 맑은 유리 너머로 참된 세계 구조가 보일 거라는 게 나의 시론이었다. 그것을 ‘내 시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내 것이었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서, 나는 다만 전투적으로 나를 억압하고 산 것뿐이었다.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카페 안의 젊은 그들과 나 사이엔 전쟁에서의 전선보다 더 삼엄한 경계선이 쳐져 있었다. 잔인한 금줄이었다. 세대 간의 단층을 왜 모르겠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단층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하지만 내가 저들과 친구로 지내자고 요구한 바 없고, 내가 저들의 자리에 끼어 앉으려 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한 지붕 아래 있는 것만도 참지 못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세계 어디에, 저렇게 또래들만 모여 앉아 늙은이는 ‘무조건 나가달라’고 말하는 곳이 있을까.

어떤 경우, 사실적이고 생생한 묘사는 저주받은 자들이 하는 짓이다. 서지우는 내가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방법까지 모두 동원해 철저히 그애를 갖고 놀았다. 그렇다고 나는 믿었다. 나의 집, 서재, 침대 위였다. 나는 사디스트도 아니고 마조히스트도 아니다. 그 순간 내가 본 모든 것을 더이상 리얼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잔인한 사실주의자들이 벌이는 극단적인 가학이나 피학일 것이다. 내가 어찌 초목 옆에서 살아야 마땅한 은교의 희디흰 대지가 나의 서재, 나의 침대에서 서지우라는 ‘짐승’에 의해 속속들이 해체되고 망가지고 파먹히는 것을 여기에 다 낱낱이 묘사할 수 있겠는가.

모든 나의 괴로움 사이 죽음과 나 사이
내 절망과 살아가는 이유 사이에는
부정不正과 용서할 수 없는 인류의 불행이 있고
내 분노가 있다

―P. 엘뤼아르(Éluard), 「사랑의 힘에 대하여」에서

불에 타고 난 노트의 재를 그녀가 울면서 화장실 변기 속에 주워넣고 있었다. “할, 할아부지…… 아무 죄…… 없어요! 진짜로…… 시……인이었어요!” 그녀가 검댕이 잔뜩 묻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봐요, 변호사님. 나하고보다…… 할아부지하고 서선생님하고…… 더 친하다고 그랬잖아요!” 눈물과 검댕이가 범벅된 그녀의 얼굴은 애련했다. “이거, 태운 게…… 죄라면요, 처벌받을게요. 저는요, 바보같이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녀가 이윽고 화장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할……아부지가…… 나를요, 이렇게…… 갖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구요. 이까짓 게, 뭐라구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쳤다. “뭐예요…… 바보같이, 자기 혼자서……” 나는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의 손에는 노트를 묶도록 된 검정 끈만 달랑 들려 있었다. 나는 얼결에 타다 만 그 끈을 받았다. “할아부지요, 몰스킨에다…… 만년필로 썼네요. 자기만 멋 내구……” 웃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는 얼른 웃지 못했다. 그 대신 그칠 듯했던 울음이 다시 흘러나왔다. 검댕이 섞인 검은 눈물이 일찍이 이적요 시인이 그녀에게 사입혔던 노란 셔츠에 뚝뚝 떨어졌다. “몰스킨이라니?” 내가 화제를 돌리려고 짐짓 반문했고, 그녀가 나의 아둔한 반문에 비로소 울다 말고 킥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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