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엔 자신이 바라는것을 얻기 위해 부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무살엔 내가 되고 싶은것들이 되기 위해서 그것을 그러 모아야 했다. 아직 충분이 부수어 지지 않은곳은 이전보다 더 힘들게 낑낑대며 부수었다. 스물 다섯이 넘으면서 뜻하지 않게 이곳저곳 갈라진 나를 보았다. 아직은 아닌데. 그러면 안되는데 싶은데. 갈라지고 터져서 흉측해진. 에피톤의 "봄날,벚꽃,그리고 너" 곡을 들은건 그때쯤이었지 싶다. "벚꽃" 빼고는 다른곡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아마도 그건 직접연주한것이 아닌 프로그램을 써서 만든 곡이라는 데서 생긴 왠지 모를 거부감이었다. (사실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이날의 연주는 그 모든것을 뛰어넘는 정점에 있었다. 불평하고 불신하던 그의 연주곡들은 CD에서 들었을때와는 역.시. 다른 면들이 있었다. 위안이 되었고. 역시 위로가 되었다. 말하자면 커다란 균열을 잘 매운. 그런기분이다. 하지만, 여전히 CD의 에피톤을 좋아할수 있을지는 의문.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 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완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