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나약함을,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임기응변식의 보강을 해가며 얼버무리는 사이에 덕지덕지 기워댄 누더기 같은 자아가 형성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이로제는, 그녀의 생명력의 울부짖음이었던 것이다. -p16
시간은 하루를 마감하며, 어떤 거대하고 정겹고 두려울 만큼 아름다운 것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무대에서 사라져간다는 것을 알았다.
실감했다.
거리로, 내게로 스며든다. 부드럽게 녹아, 똑똑 방울져 떨어진다.
....
이렇게 박력 있는 저녁노을이라도 보지 않는 한, 좀처럼 당연한 것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들이 백만 권의 책을 읽고, 백만 편의 영화를 보고, 애인과 백만번의 키스를 하고서야 겨우,
<오늘은 한번 밖에 없다>
는 걸 깨닫는다면, 단 한 번에 깨닫게 하고 압도하다니, 자연이란 그 얼마나 위대한가. 구하지도 않는데, 그냥 놔두면서 알게한다. 누구에게든 구별 없이 보여준다. -p 176
여름.
매미 울음소리. 나는 어린아이이고 집에 있다. 다다미에 엎드려 자고 있다. 아버지의 맨발이 눈앞을 가로지른다. 검은발, 짧은 발톱. 저쪽에서는 여동생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발, 창밖은 녹음. 동생의 뒷모습. 두 갈래로 묶은 머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사쿠미가 잠들었다는데. 뭐 좀 덮어주지 그래. 어머니가 대답한다. 지금 튀김 만드느라 안 들려요! 부엌에서는 튀김을 튀기는 소리가 난다. 냄새도 난다. 긴 젓가락을 든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이블을 들고 와 덮어준다. 동생이 돌아보며, 언니 안자요, 라고 말한다. 웃는다. 그리운 뻐드렁니. Feed, 바로 이런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몸은 기억하고 있다. 모든것이 상실되어도, 이렇게 변함없이 기억하고 있다. 모두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새겨져 있다. 자기가 부모가 되기 전에는 좀처럼 떠올리지 않지만, 기억은 살아 있다. 죽을 떄까지. 설사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어서, 가정이 없어지더라도, 자기가 할머니가 되어도. -p268
.... 당신은 구제할 길 없이 굶주려 있고 고독합니다. 당신이 머리를 다치기 전에 가족이 많이 죽었죠. 그래서 그 다음은 당신이 죽을 차례였던 겁니다. 그렇게 되기 쉬운 핏줄이에요....
하지만 당신한테는 뭔지 모르겠지만 플러스 알파가 있어서, 바로 그게 아슬아슬하게 당신의 목숨을 연장시킨겁니다. 나는 운명론자도 아니고, 점성술에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머리를 다친 후의 당신의 인생은 새하얀 백지, 덤, 뜻하지 않은 선물, 아무런 시나리오도 없고, 그리고 당신은 그렇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워 지거나 허무해지지 않도록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요. 말할 수 없이 고독합니다. 애인은 꽤 머리도 좋고,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당신의 고독을 감싸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당신 개인의 내면적 혼란에 있어서는 그 존재도 단순한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절망에 이르기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금 당신의 전부입니다. 한번, 죽었어요. 이전의 인생에 마련돼 있었던 꽃과 열매는 모두 변화했습니다.
...
한밤중에, 자신이 누군지 몰라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있죠. 그게 당신입니다. 몹시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만남도, 헤어짐도 지나갈 뿐, 보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해맬 수밖에 없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아마 죽어서도. 그렇다는걸 깨닫지 않도록, 내면에서는 굉장한 혼란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다는 걸 칭찬해 주어도 좋을 만큼
그게 나인가요?
나는 말했다.
고독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이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관객을 필요로 하니까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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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주위엔 p444의 글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